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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를 영어로 ‘어톤먼트’(atonement/at-one-ment)라 하는데, 본래 그 어휘가 ‘대신’보다는 ‘하나 될 때에’라는 의미가 핵심이다. 한국 개신교가 신뢰성과 영적 능력을 잃어버린 것은 ‘하나 됨의 사건’ 없이 대속교리를 입으로만 남발하기 때문이다. 더 청빈해지고, 더 단순성을 사랑하고, 더 희생해야 한다.

인도 뉴델리의 국립기념묘원에 있는 간디의 묘소를 찾았을 때, 묘역 입구 화강암 벽면에 저 유명한 ‘일곱가지 사회악’이 음각되어 있었다. 짧은 일곱마디로 응축된 내용이 매우 인상 깊었는데, 그 인용구 출처는 ‘1925년 <청년 인도>(Young India)에서’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여행자는 원문 기사를 찾아내서 읽어보고 싶었다. 맘먹고 간디기념관을 찾아가 직원에게 사정을 말하고 ‘1925년 <청년 인도>’ 도서대출 신청을 했다.

친절하게도 직원은 1925년에 간행된 <청년 인도> 52주 분량 전체, 곧 세권으로 묶어 제본한 두툼한 자료를 서가에서 꺼내다 주었다. <청년 인도> 몇호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았기에 몇시간 동안 뒤져 해당 기사를 찾아냈을 때, 여행자는 마치 보석을 발견이나 한 듯 가슴이 뛰었다. 발행일자는 1925년 10월22일 목요일, 제7권 43호에 실린 글이었다. 일년 구독료가 당시 인도 화폐단위로 5루피라고 적혀 있으니 얼마나 서민들의 사랑을 받던 주간신문이었던가 짐작하게 했다.

그런데 그 유명한 ‘일곱가지 사회악’이 실린 글은 기대와는 달리 논설문이 아니었다. ‘범죄가 비도덕적이 아닐 때’라는 제목이 붙은 짧은 글 말미에 적혀 있는 격언 같은 일곱마디 경구였다. 편집주간이었던 간디 이름 약자(M.K.G)를 기사 끝머리에 밝힌 것을 보면 간디가 쓴 글임에는 틀림없었다. 그 경구 일곱마디는 오늘 한국 사회에서 진지하게 경청해야 할 가치가 있다. 이제는 꽤 널리 알려져 있지만 간디가 말하는 ‘일곱가지 사회악’은 이렇다. 원칙 없는 정치, 일함 없는 부의 축적, 양심 없는 쾌락추구, 개성 없는 지식축적, 도덕성 없는 통상교역, 인간성 없는 자연과학, 그리고 자기희생 없는 종교라고 갈파한 것이다.

‘일곱가지 사회악’을 언급하면서 간디가 당시 인도 사회와 세상을 향해 말하려는 의도는 좁쌀영감의 도덕강론 같은 것을 다시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영국의 무력적 식민통치에 맞서 비폭력적 저항운동을 펼쳐가면서 간디가 뼈저리게 느낀 것이 있었다. 국가법이라는 것이 반드시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과 실정법에 따라 양심범들을 범죄자로 몰아세우는 공권력의 남용이 허위의식에 사로잡힌 강자들의 자기기만일 수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간디가 예를 드는데, 현대사회 자체가 거대한 범죄공장 같아서 군국주의자는 살인자와 다름없고, 조폭들은 부패한 정치꾼들과 공생관계에 있는 똘마니들이 아니냐는 것이다. 작은 도둑은 사회가 용인하지 않는 방법으로 빵 몇조각을 훔쳐 배고픔을 충족하려던 사람이지만, 정말 큰 도둑은 사회 전체에 해를 입히면서 자기가 노동하지도 않는 공공자산을 ‘눈먼 돈’으로 간주하고 크게 해먹는 놈들이라는 것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 간디가 지적한 ‘일곱가지 사회악’을 절감하게 한다. 일곱가지 사회악 중에서 오늘의 이 글은 마지막 경구와 관련되어 있다.

희생 없는 종교는 사회악이라고 했다. 본래 ‘희생’(犧牲)이라는 어휘는 종교의 본질을 드러내는 핵심적 단어이지만, 현대인들은 그 본래 의미를 거의 이해하기 어렵게 되었다. 사전을 보면 세가지 의미로 쓰인다. 첫째는 신명(神明)에게 바치는 산 짐승을 말한다. 둘째는 예기치 않은 재난으로 헛되이 목숨을 잃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남이나 어떤 일을 위하여 제 몸이나 재물을 바치는 자발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심지어 야구경기에서 희생타에 의하여 주자를 홈인시키는 것도 영어권에서는 ‘희생’(sacrifice)이라는 단어를 쓴다. 종교를 고대인들의 무지의 소산이라고 생각하는 계몽주의 시대 이후 현대인들은 ‘희생’의 본뜻을 간과하여 신들의 분노를 달래거나 환심을 사려는 물질 공여 행동이라고 곡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래 종교가 시작되던 자리에서 보면 생명은 전체로서 하나이며 유기적으로 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한 마을 공동체에서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 다른 생명을 살상하거나 생채기 내면, 하나이고 조화롭던 생명질서는 흐트러지고 소통이 안되고 평화를 잃게 된다. 그 결과 신적인 것, 인간적인 것, 자연적인 것 그 삼자 사이에 분열이나 간극이 생겨서 마침내 각종 위험과 질병이 발생한다. 생명공동체 안에서 누리던 삶의 기쁨이나 연대감은 사라지고 탄식과 긴장감이 높아간다. ‘생명은 개체이면서도 항상 하나로서 전체이다’라는 자각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자기중심적 소유욕과 생존본능으로 마을은 분열되고 살벌해진다.

본래 종교란 같은 종파에 속한 종교인들끼리 모여서 자기들 사이에서만 통하는 주문을 외우며 북 치고 춤추는 종교놀이나 종교사업이 아니었다. 언제나 마을 전체, 사회 전체를 병듦과 분열로부터 ‘건강한 하나의 생명체’로 되살려 내려는 혼신의 몸짓이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바치는 거룩한 생명의 불태움이 ‘희생’이었다. 김동리의 문학 작품 중 <등신불>에서 독자들은 ‘희생’을 읽는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고 나라가 독재와 부패로 병들었을 때, 베트남 스님들이 네거리 한복판에서 조용히 좌선한 채 ‘소신공양’을 했다. 군부독재 시절 어린 여직공들을 건강하게 살려내려는 전태일의 분신자살과 ‘동아투위’ 언론인들의 고난의 행군은 비인간화된 사회와 병든 민주주의로 하여금 숨쉬기를 계속할 수 있게 했다. 열거한 일들은 그 모두가 ‘희생’의 본래 뜻을 조금이라도 드러낸 사례들이다.

고대 부족사회에서는, 생명을 죽이거나 상하게 하면 동등한 생명값으로만 보상해야 하는 것이 생명원칙이었다. 그런데 보상해주어야 할 사람의 생명은 두개가 아니고 하나뿐이기 때문에, 자기 생명을 죽이는 대리적 상징행위와 생명은 생명체의 피 속에 있다는 신념이 하나로 통합되어, 반드시 산 짐승을 피 흘리게 죽여 ‘희생’으로서 불살라 바쳤던 것이다. 본래 ‘희생’은 주술도 아니고 ‘대신 때우기’도 아니다. 전문 종교인들이 특별한 권위를 가지고 집례하는 법회, 미사, 예배에서만 발효되는 기적행위도 아닌 것이다.

희생제사는 ‘희생물’과 ‘제물 바치는 당사자’와 ‘전체 생명’ 그 삼자가 ‘하나 됨의 일치 경험’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면 십자가 위에서 처형당한 예수의 죽음을 ‘희생제사’로 기독교 교인들이 받아들인다면, ‘예수 생명’과 ‘신자 생명’과 ‘진리이신 하느님’과의 삼자 회통의 일치 경험이 동반되어야 한다. 속죄를 영어로 ‘어톤먼트’(atonement/at-one-ment)라고 하는데, 본래 그 어휘 자체가 ‘대신’이라는 의미보다는 ‘하나 될 때에’라는 의미가 핵심이다. 바로 희생제사의 요체이다. 요즘 한국 개신교가 신뢰성과 영적 능력을 잃어버린 것은 민족 전체 생명과 하나 됨의 희생을 외면할 뿐 아니라, 희생물과 희생제사 드리는 자 사이의 ‘하나 됨의 사건’ 없이 대속교리(代贖敎理)를 입으로만 남발하기 때문이다.

4월엔 제주 4·3 민간학살 사건, 4·19 민주학생의거,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고난주간과 부활절이 있다. 5월엔 어버이날, 5·16 쿠데타, 5·18 민주항쟁, 그리고 불교의 석탄절이 있다. 모두 ‘희생’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할 생명의 계절이다. 알고 보면 지금 살아 있는 생명은 과거나 오늘 그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만 가능하다. 특히 사람 생명은 그 누군가의 희생 위에 핀 대리적 꽃이다. 동학의 해월 선생께서 “하늘로써 하늘을 먹는다”는 ‘이천식천’(以天食天)의 도리를 설파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 엄연한 생명의 이치와 실상을 부인하거나 절감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철없는 사람이다. 좀 심하게 직설적으로 말하면 아직 사람이 덜 된 짐승 단계 인간이다. 오늘의 종교는 더 청빈해지고, 더 단순성을 사랑하고, 더 희생을 통하여 전체 민족 상처를 감싸는 종교로 환골탈태해야 한다. ‘희생’은 종교의 한가지 덕목이 아니라 종교의 진위를 판가름하는 핵심 본질이기 때문이다.

김경재 목사·한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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