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숨밭컬럼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특별기고] 진보적 참교육과 측은지심의 복원 / 김경재목사


       137414208698_20130719.jpg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어려움에 처한 생명을 볼 때 이심전심 자발적으로 공감하고 반응하는 능력이 측은지심이다. 진보적 참교육이란? 차별 없는 교육과 재능개발 육성도 좋지만, ‘교육철학의 대가’ 맹자가 강조한 것, 측은지심을 비롯한 인의예지 단초를 살려내 육성하는 교육이 아닐까?

복숭아가 출하되는 7월이 되면, 필자는 오랫동안 잊고 왔던 옛 기억을 되살리며 나 자신과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된다. 그것은 팔딱거리는 참새의 심장처럼 혹은 이른 봄 여린 새순처럼, 어린 소년 시절 내 생명 속에 있던 ‘측은하게 여기는 맘’이 얼굴을 내밀던 경험이다. “측은히 여기는 맘은 착함의 단초!”(惻隱之心 仁之端也)라고 갈파했던 맹자의 가르침을 두고 하는 말이다. 측은지심을 너무 오랫동안 망각해 왔을 뿐만 아니라 억압하고 짐짓 무시하며 살아온 인생이었고, 그리 받았던 사회교육 아니던가 뒤돌아보게 된다.

사람의 기억이란 참 신기한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두해 전쯤, 그러니까 1948년 소년 나이 9살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라고 추정된다. 태어나서 자란 곳은 무등산 아래 빛고을 광주였다. 소년은 광주천 노변을 끼고 형성된 시장 구경 하기를 좋아해서 곧잘 어머니를 따라나서곤 했다. 장맛비답지 않게 보슬비가 내리던 어느 날, 큰 자두 크기밖에 안 되는 햇복숭아를 한무더기씩 좌판에 올려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몇몇의 아낙이 있었다. 얼굴은 볕에 그을려 까칠하고, 머리카락은 이마 위로 흐트러진 채로, 기워댄 삼베 웃저고리는 빗물에 젖어 속살 앞가슴이 윤곽져 보여도 부끄러움은 가난에 지친 여인에겐 사치인 듯싶었다.

소년은 땀 찬 손바닥에 동전 1000원가량을 꼭 움켜쥐고, 작은 몸을 어른들 큰 몸으로 가리우면서 좌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손님을 기다리는 그 아낙네들 앞을 긴장하며 한두번 오갔다. 그러다가 잽싸게 돈을 던지듯이 좌판에 올려놓고, 햇복숭아를 전부 챙기지도 않은 채, 냅다 도망치듯 장 보는 사람들 속을 헤집고 달려나갔다. 인적 드문 골목길을 골라 집으로 단숨에 달려와 숨을 몰아쉬면서 공부방 책상 앞에 들어가 앉았다. 큰 잘못이라도 지은 양 가슴은 뛰고, 부모 형제가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물을까 봐 짐짓 태연한 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다음 날 학교 친구 그 누구에게도 소년의 자못 용감한 착한 행동은 말하기가 쑥스러운 일이고 발설해서는 안 될 일이라 여겨져서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이상하게, 소년의 마음은 어쩐지 스스로 뿌듯하고 기쁘고 밝아진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뒤 까맣게 그 일을 잊었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런 일이 있은 지 70년이 가까워진 요즘, 필자는 <맹자>의 저 유명한 공손추(상)에 나오는 ‘측은지심은 인지단야’라는 주장을 다시 꺼내 읽는다. 맹자가 사례를 들어 설명하기를 어린아이가 마을 우물에 빠지려 할 때, 조건 없이 달려가 아이를 구해내는 것은 측은지심이 사람 본성 속에 있기 때문이지 어떤 보상이나 칭찬을 듣기 위함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저 유명한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인간 심성 어느 틈새와 어떤 동기에서 나타난 것인지를 설파하고, 특히 단호하게 말하기를 “측은해하는 맘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無惻隱之心非人也)라고 했다.

고통당하는 사람이나 상처받은 짐승, 심지어 가뭄에 말라 죽어가는 식물을 보면서 측은함을 느끼는 사람의 맘씨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맹자처럼 하늘이 본래 사람 마음속에 심어준 씨앗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에드워드 윌슨처럼 자연의 생명 진화 과정에서 생존수단으로 습득되고 유전형질로 전해지는 생물학적 특징이라고 해도 좋다. 그 두 이론은 대립적이 아니고 상보적이다. 왜냐하면 생명 진화는 단지 물질분자의 복잡화(複雜化) 과정만 아니라 정신이 깊어져 가는 새로움의 창발(創發) 과정이고, 진선미를 추구해가는 ‘창조적 진화’이기 때문이다(테야르 드샤르댕).

그리스도교 역사 2000년 동안 동슬라브족 러시아인이 습득한 동방정교회 신앙심을 공산주의 혁명 100년 동안 무신론으로써 지워 없애지 못했다. 하물며 40만년 이상 생존투쟁을 거치면서도 호모 사피엔스 생명 안에서 형성되어온 ‘측은지심’이 불과 지난 400년간 자본주의 사회의 무한경쟁 생활에 내몰린다 해서 쉽게 말살되어질 수 없다. 다만 알맞은 환경조건을 만나 발현(發現)되기를 기다리는 생물학적 유전인자처럼, 측은지심은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심성적 디엔에이(DNA)이다. ‘인지단야’(仁之端也)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착한 맘의 끝단이요 씨종자 속의 유전자 같다는 말이다. 그것은 지키고 키우고 격려해야 할 잠재적 가능태일 뿐 아직 현실태는 아니다. 발현되면 ‘착함과 어짊’이라는 귀중한 사람 성품으로 피어날 것이요, 무시하고 방치하면 사람은 단지 두뇌세포 용량이 큰 영장류 짐승이 될 것이다.

세월호 침몰, 청문회 연속 낙마, 노인 자살률 급증, 4대강 사업 강행 실패 사례에서 보듯이, 우리 사회의 온갖 문제 발생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야생적 자유주의’ 상황이라고 비판한 현대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측은지심이란 중국 전국시대 유가(儒家)의 관념론에 불과하다고 그것을 암묵적으로 기피하고 억압해온 측면이 있다. 그러나 측은지심은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시혜적 동정심이 결코 아니다. 민중의 사회변혁 의지를 약화시키려는 권력과 지식의 지배수단도 아니다. 자비(慈悲)라는 본래 글자 뜻이 동정적 시혜란 의미가 아니고, “하늘 같은 심성으로 함께 슬퍼하는 큰 마음”(윤구병)이듯이, 어려움에 처한 생명을 볼 때 이심전심 자발적으로 공감하고 반응하는 능력이 다름 아닌 측은지심이다.

생명현상이란 ‘낱생명’이면서 낱생명을 가능케 하는 온갖 ‘보(補)생명’들과 더불어 유기적 통체(統體)를 이룬다. 그 전일적 생명을 범지구적 ‘온생명’이라고 장회익은 이름 붙였다. 그리고 ‘온생명’을 신체에 비유한다면, 종합판단 기능을 하는 중추신경계 위상(位相)을 호모 사피엔스가 갖는다고 갈파했다. 그의 온생명론은 근세 유럽문명을 지배해 왔던 인간중심주의하고 구별되는 새로운 생태학적 인간론이다. 신체는 각 기관이 기능 면에서 다르지만, 위경련이 일어날 때 몸 전체가 함께 통증을 느끼고, 발끝이 결승골을 넣을 때 온몸이 함께 환희를 느끼는 것은 몸의 일부인 중추신경계 역할 때문이다. 그처럼, 인간 자신이 자연동산에 출현한 한갓 풀꽃 같은 ‘낱생명’이지만, 놀랍게도 자신을 포함한 대자연 전모를 집합적 지성에 힘입어 ‘온생명’으로서 깨닫게 되었고, 개인적 감성을 통해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7월 첫째 날부터 닻 올린 제2기 진보교육감 시대에 거는 국민들의 기대가 참으로 크다. 이달 초, 소위 진보교육감들의 취임 일성과 각오들이 소개되었다. 창의적 교육, 차별 없는 교육, 학생의 잠재적 능력 발휘, 일반 고등학교 살리기를 통한 공교육 위상 회복, 그리고 탈권위적 교육행정을 약속하였다. 그런데 그분들이 꿈꾸는 교육방향을 들여다보면, 프랑스 혁명에서 집약적으로 표출된 근대시민사회의 공동이념 ‘자유, 평등, 박애’ 중에서 자유와 평등은 강조되는데 박애를 실천할 청소년 심성함양 교육 비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진정한 진보적 참교육이란 무엇인가? 차별 없는 교육과 재능개발 육성도 좋지만, 교육철학의 대가였던 맹자가 강조한 것, 측은지심을 비롯한 인의예지 단초(端初)를 살려내서 육성하는 교육이 아닐까? 탐욕, 무책임, 이기심의 총중량이 지나쳐 복원력을 상실한 세월호는 안전항해를 위해 선박 밑창에 평형수(平衡水) 보충이 필수적이었다. 한국호라는 큰 배의 안전항해를 위해서, 측은지심의 복원은 인간교육 밑바탕에 평형수 보충과 같은 일이다. 또한 날로 양극화되어 가는 위험한 사회에서 비폭력적 사회혁명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