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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교회의 공의회성과 공공성 성찰

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


1. 사도신경 고백중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의 참 뜻


 사도신경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압축 총괄하는 가장 고전적이고도 표준적 신앙고백문이다.  니케야신조나 칼케톤신조나 웨스트민스터신조와  웨스트민스터신조등과 비교할 때   ‘사도신조’ 신앙고백  내용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한국교회는, ‘사도신경’(使徒信經)이라고 호칭한다. 동북아 문화권에서 문서에 ‘경’(經)이라는 글자를 부여하는 것은  ‘성경’에서 처럼 경전적 가치만큼 그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신학적으로  말하면 ‘사도신조’라고 호칭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사도신조의 제3부를 형성하는 “성령을 믿습니다”라는 기본고백의 다음문장에 “거룩한 공회를 믿습니다”[ (Credo in) sanctam ecclesiam ]라는 문장이 곧 뒤따른다. 한국 개신교 교회예배 때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라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는 신앙고백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한채 한국 개신교 신도들은 그토록 중요시하는 ‘사도신경’을 습관적(?)으로 암송하고 있는 셈이다. 이 글의 주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라는 고백의 의미를 좀더 분명하게 밝히고 나갈 수 밖에 없다.

  ‘거룩한 공회(公會)를 믿사오며...’라고 할 때 공회(公會)라고 번역한 원문은  ‘에클레시아’(ecclesia, 부름받은 교회 회중, 교회공동체)를 말한다. 그런데 그 교회공동체의 근본 속성은 ‘거룩한, 성스러운 것’이라고 규정한다. 일반적으로 개신교인들은 성령을 믿는다는 신조고백 어휘와 사도신조 제3항목에 뒤따라서 열거되는 성도간 교통, 죄의 용서, 몸의 부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공회를 믿는다”는 말은 이해되지 않는다. 마치 교회공동체가 자기자신을 믿는다는 말처럼 오해되기 때문에 얼른 참 뜻 파악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 바로 거기에  역사적 현실교회 타락의 근본 문제원인이 숨겨저 있다.

  “거룩한 공회(교회)를 믿사오며..”라는 사도신경의 그  한 구절이 유독히 국어문법적으로 얼른 이해되지 않는 이유는 국어문법적 모순때문이 아니라 공회(公會= 교회 = ecclesia)를 한국 개신교 교인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예수믿는 몇사람이나 몇가정이 헌금을 모아 교회당 대지를 구입하고 교회당 건물을 지으면 그것이 곧 ‘교회’라고 착각할 정도로 교회론이 타락되고 변질되었다.  해방될 무렵까지만 해도 우리조상들은 교회건물(교회당)을 예배당이라고 하였기에 교회와 교회당의 혼돈은 없었다.  ‘거룩한 공회(교회)’를 인간들이 주체적으로 이니시어티브를 가지고 역사문화적 상황 속에서 좋은 목적을 가지고 결사단체(結社團體)를 이루면  자동적으로 ‘교회가 탄생한다’고 생각하는 점에 결정적 오해가 있다.

  현실적으로 한국의 모든 개척교회 운동이 위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자발성과 주체성에 의해 이뤄저 왔다고 해도,  ‘교회 =거룩한 공회’는, ‘에클레시아’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대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은혜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사람들을  ‘불러모아  성별한 공동체’ 라는 본질적 특징이 있다.   그 공동체의 출발과 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몇몇 뜻있는 사람들의  자의적인 선택결과가 아니라는 말이다. 교단의 교세를 강화하기 위한 전략적 포석으로 형성된 개척교회운동이 자동적으로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니란 말이다. 그렇게 하라고 부르시고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분부와 위탁을 받고서 하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인간들의 ‘종교사업’인 것이지 ‘거룩한 공회’와는 아무관련 없는 세속적 사업인 것이다.

  그 점이 분명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의 종교법인단체의 소유물도 아니고 교황의 것도 아니고 개척교회 목사의 것도 아니고, 그 어떤 땅위의 능력있거나 존귀한자의 소유물이 아닌 것이다. 현실적 교회 안에서 교단책임자들과 교회 성직자들과  교회 당회원들에게 허락한 권위는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회중’을 돌보고 섬기고 바르게 봉사하고 ‘거룩한 공회답게’ 빛과 소금이 되도록 하라는 ‘잠정적 위탁’ 이외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 사도신경 셋째항목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라는 고백문의 의미가 분명해졌다. 그 고백구절은  교회당 건물, 교권조직체로서 권위, 과거 쌓아온 거룩한 전통, 그리고 신도회중 그 자체를  믿는 다는 말이 아니다. 그 교회공동체를 ‘거룩한 공회’로 만드시는 그리스도와 성령이 현존하시고, 그 교회공동체와 함께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인간들의 종교집합체로서 현실적 신도회중은 연약하고, 분쟁하고, 죄가 많을 지라도,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심판과 치유와 인도하심이 중단되지 않는 곳이 교회임을 믿는다는 고백인 것이다.

  
2. 니케야신조의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와 개신교 현실


 사도신조 형성사의 먼 뿌리는 2세기말에 이미 로마교회에서 세례문답서로 신조의 기본 뼈대가 형성되었다. 4세기 암부로시우스가 감독으로 있었던 밀라노총회에서 교황에게 보낸 서한에 사도신조가 나타나고, 4세기 이후부터 라틴어로 정확하게 표현되면서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조에 포함된 중요한 구절들이 첨가되게 되었다.   

 오늘 이글의 주제인 교회론이 보다 더 분명하게 신조로서 확정된 것은 ‘니케야신조(325)’와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381)’에서 나타났다. 특히 “하나(una)이고, 거룩(sancta)하며, 보편적(catholica)이고, 사도적(apostolica)인 교회를 우리는 믿습니다”라는 신조 고백문이 공의회에서 채택된 것이다. 소위  교회의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이라고 우리가 일컫는 내용이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가  교단마다 갈라져 난립하고 상호비방하며, 같은 교단 안에서도 개교회주의가 발호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의 대상이 되어있는 현실에서 니케야신조의 위4가지 교회본질 고백이 아직도 유효한가를 우리 스스로 엄숙하게 묻게 된다. ‘니케야신조’에 나타난 교회의 4가지 본래적 속성의 의미를  다시 숙고하면서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 병폐를  부그럽지만 다시 성찰해 보자.

 ‘하나의 교회’(una ecclesia = One Church)를 믿는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크고 작은 교회공동체들, 예배의식과 교리교의 부분에서 일부 특이성과 차이성이 있는 교회들, 도시와 농촌교회들, 그리고 교회사속에서 갈라진 로마카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와 개신교와 영국성공회등 여러 전통을 달리해온 교회공동체들이 있지만, 그 현상적 차이를 넘어서서 교회는 ‘일치성과 단일성’을 본질적으로 가진다는 고백이다. 왜냐하면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그 본질이신 그리스도가 하나요 성령이 하나이며 하나님이 한분이시기 때문이다.

 교회의 단일성 혹은 일치성을 생각할 때,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의 교회론은 너무나 심각하리만큼 병들고 변질되어 있다. 우선 개신교 이외 다른 교회전통들 예들면 로마 가톨릭교회와 희랍정교회, 그리고 영국 앵글리칸(聖公會) 형제교회들을 무관심하거나 부정하기까지 한다. ‘전통과 전례(典禮)와 교리면에서 일부 생각을 다르게 갖는 형제교회들’이라는 관용적 마음이 없다.  다른 교단들을 거의 타종교 집단들처럼 생각한다. 개신교 안에는 종교개혁 시대 때부터  성경해석 차이, 성만찬 이해의 차이, 성령은사 체험과 윤리생활 강조차이등 다양성에 의해 수많은 교파로  분열되어 왔기에 심하면 다른 종파를 대하듯 한다.  

  교파분열은 ‘하나의 교회’가 나뉘어 졌다는 부정적 의미가 있지만, 루터교와 장로교와 감리교와 성결교와 침례교등에서 보는바 처럼 복음의 풍요로움에 대한 체험과 이해의 강조점 차이로 말미암아 생긴 다양성이라는 긍정적 측면도 있다.    문제는 개신교 역사과정 속에서 다양한 교파가 발생했다는 사실 그 자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하나이다’라는 근본신앙 고백을 견지하지 못하고 개신교 각교파는 각교파의 전통안에 갇히고  소통 ․ 교류 ․ 협력 ․ 상호배움을 멈추어 버렸다는데 문제가 있다.

  ‘교회의 보편성’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나는 한 거룩한 보편적 교회(ecclesia catholica)를 믿습니다”고 고백 할 때, 라틴어 ‘에클레시아 가톨리카’(ecclesia catholica)라는 단어는  지금 로마 가톨릭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보편적 교회, 세계적 교회, 우주적 교회임을 믿는다’는 말이다. 가톨릭이란 ‘유니버셜’(universal)이란 뜻이다. 하나님의 교회,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교회,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는 모든 인종, 민족, 국가, 이념, 성별, 계급등 모든 상대적 차이를 넘어서 어머니 마음처럼 모두를 품고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보편적 교회’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좀더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한 면이 참으로 아쉽다. 지금도 한국 개신교는 교회의 거룩성과 사도성은 강조하면서도 교회의 단일성(Una)과 보편성(Catholica)에 대한 충분한 숙지는 그 갈 길이  참으로 멀다 할 것이다. 2013년 부산에서 개최되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와 2014년 서울에서 개최될 세계복음연맹(WEA) 총회를 앞두고 한국 개신교회는 교회의 하나임과 보편성에 대한 보다 심층적 신앙고백이 요청되고 있다.


3. 교회의 ‘공의회성’과 ‘공공성’에서 본 개신교의 비복음적인 현실들과 극복의 과제


 공의회(公議會)란 오늘날 제2차버티칸 공의회(the 2nd Vatican Council)라는 칭호처럼 마치 로마카톨릭교회 안에서 주교들이 모여 신앙교리나 사회윤리나 현실문제에 관하여 협의 토론 결정하는 공식적 종교회의를 의미하는 것처럼 특별개념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공의회는 로마카톨릭교회의 독점물이 아니다. 제10차 부산 세계교회협의회도 ‘공의회’인 것이며, 범위가 좁더라도 각교단의 해마다의 총회도 ‘공의회’(公議會)인 것이다.

  그런데, 교회의 공의회 전통에서는 매우 중요한 안건에 대하여는 충분한 토의와 협의를 거쳐 ‘만장일치’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 정신에서 볼 때, 개신교의  공의회격인 각 교단의 총회에서 지나치게 세상적인 ‘다수결 원칙’을 마치 가장 옳고 정당한 방법인양 당연시하는 풍토는 개신교가 “교회는 하나요, 거룩하고, 보편적이요,사도적이다”라는 참 정신을 많이 잃어버린 증거다.
 요즘 교회의 공의회성(公議會性)과 다물어 교회의 공공성(公共性)이라는 말이 많이 회자되는 것은 이유가 있다.  교회가 교회답게되는 ‘사도신조’ 고백정신과 니케야신조가 증언고백하는 4가지 본질특성을 잃어버리고 개인 목회자의 사유화(私有化) 현상과 이기적인 개교회주의(個敎會主義)가 너무나 발호하여  한국 개신교의 존립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위기담론인 것이다. 교회의 공공성(公共性)이 요청되는 이유는 두가지가 원인처럼 보인다.

  첫째는,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근본양태(根本樣態)는  예수 그리스도가 ‘타자를 위한 존재’(본 훼퍼) 였듯이, 세상을 위하고 세상을 생명 ․ 평화 ․ 정의가 보다 명료하게 지배하는  ‘하나님의 나라’에로 변혁해가는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는 요청이 첫째이유다.

 둘째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집단의 사회역사적 삶이 유기체적 관계망 구조속에서 영위 되기 때문에, 교회도  사회적 연대책임과  교회공동체가 일반사회적 타자와의 관계에서 보다 책임적이고 윤리적 이어야 한다는 요청이다. 교회가 특이한 신앙공동체이지만,  세상 안에  존재한다면, 교회도 사회적 공공성(公共性)을 갖추어야할  책임에서 면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공성’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사회일반이나 여러단체에 두루 관련되거나 영향을 주고받는 성질”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교회성직 대물림, 교회예산 집행의 불투명성, 공공장소에서 전도행위 일탈 행위, 종교자유를 오남용하는 자격미비의 교역자 양성기관 방치, 이웃종교에 대한 공격행위와 적대적 비관용성, 선교방송매체의 사유화와 그 해독, 정치현실에  휘둘리는 교단지도자들의 어용사제류의  정치예속,  교역자들의 세금납부 반대등 여러 가지 점들은 사회적 공공성 차원에서 볼 때 문제점이 심각한즉 개신교가 보다 책임적이고 윤리적이기를 사회가  요청하는 것이다.

  그 치유의 길은 사도신조의 제3문단에 나타나는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 신앙고백정신을 회복하고, 니케야 신조에서 더욱 상세하게 규정한 교회의 4가지 속성 곧 “하나의(una) ․ 보편적인(catholica) ․ 거룩한(sancta) ․  사도적(apostolica)인 교회(ecclesia)를 믿습니다”라는 신앙고백을 진실하게 고백하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길밖에 없다. 한국 개신교가 다시 소생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다음과 같은 3가지 회개하는 개혁실천이 요청된다고 본다.


4. 한국개신교의 공교회적 본질과 공공성 회복을 위한 개혁의지


 (1) ‘거룩한 공회를 믿습니다’라는 사도신조 고백의 실천

 ‘거룩한 공회를 믿습니다’라는 사도신조 고백이 빈말, 거짓말, 위선적인 말이 아니되려면, 개인이나 집단이나 인간들이 교회에 관해서 지니고 있는 일체의 ‘소유권의식’을 내려놓고 본래 주인이신 그리스도 앞에 돌려드려야 한다.

 지금 한국 개신교는 ‘거룩한 공회’를 마치 개인이나 교단의 소유물처럼 생각하고 있다. 세상법원에 ‘소유권자 등기완료’되었기 때문에 ‘거룩한 공회’가 개인목사의 것, 교단의 것, 개척선교 단체의 것, 교회당회의 것, 특별헌금한 개인신도의 것이라고 착각한다. 세상 법원이 등기로 보장하는 것은 기껒해야 물건으로서 교회당 재산이지 영적공동체의 교회가 아니다. 재산으로서 교회당 건물이나 자산도 개인이나 집단의 소유물일 될 수 없다.

  신앙적으로 볼 때,  그렇게 사유화(私有化) 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엡 1:23), ‘성령의 전’(고전 3:16),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벧전 2:9)이며  하늘법원에 이미 등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회 곧 ‘거룩한 공회’는 본질적으로 세상 안에 존재하지만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청직이 직분을 주어 그 기관을 봉사하라고 위탁할지언정 맘대로 자기 소유물처럼 처분하라고 허락한적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계신문에 흔히 나타나는 기괴한 광고들 예들면 “교회 팜니다”, “교회당 저당 융자대부 합니다”, 혹은 ‘선교목적으로 헌금을 기금으로 기독교 은행설립’ 운운하는 기괴한 광고들을 교계신문사에서는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않된다. 교회문제를 세상법정에 가지고 가는 파렴치한 신앙타락 행위도 당장 중지해야 한다. 그것은 신성모독이요, 영적 탐심이이다.  교회기관이 세상 사법기관에게 옳고 그름을 판단해 달라고 요청하는 행태(行態)는 “우리교회는 이제 자정능력이 없습니다”라고 세속사회에 대하여 스스로 도덕적 ․ 영적 ‘파산 선고’를 한 셈이어서  교회가 속화(俗化)되었다는 적라라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2) ‘하나의 교회, 보편적 교회’ 를 믿는다는 니케야 신조고백의 실천

한국 개신교는 초기 복음을 전도받을 때부터 미국이나 유럽의 교단파송의 선교사들의 도움과 목회영향으로 말미암아 장로교, 감리교, 루터교, 침례교, 오순절교등 교파교회의 특색이 강한 편이다. 선교초기에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채택으로 말미암아 개별교회의 ‘자립정신’을  강조한 것은 좋은 선교정책이었으나, 본의 아니게 ‘개교회주의’(個敎會主義)와 ‘교파주의’(敎派主義)를 강화하는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한국 개신교 신도들은 우선 ‘교회는 하나이다’라는 신조의 의미를 깊이 다시 숙지해야 한다. 로마가톨릭교회, 희랍정교회, 개신교 교회, 앵그리칸 교회등 큰 4가지 나무들이 하나의 나무둥치이신 그리스도 몸에서 벋어나간  큰 가지들 임을 바르게 교육시켜야 한다. 개신교 안에 존재하는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성력교, 침례교, 오순절교 등등 무수한 개신교 교파들은 ‘개신교’라는 큰 나무가지에서 벋어나간 잔가지들임을 가르쳐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뿌리를 모르고, 역사를 모르고, 교회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모르는 ‘작은 교파동굴’에 갇혀버리는 신도들을 양산하게 된다.  

  현실적 교파의 난립이 자랑할 것은 아니지만, “교회는 하나임을 믿습니다”라는 근본신앙을 잃지만 않는다면 다양한 교파의 현실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 아니라, 4개 복음서가 존재하듯이 복음의 깊이와 넓이와  풍요로움 때문에 그 이해와 체험의 다양성 결과라고 볼 수 도 있는 것이다.  역사현실 속에서 교회공동체는 그 다양성과 차이성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교회’에 속한 하나의 작은 물줄기이거나 살아있는 다양한 나뭇가지들 이라고 생각할 맘의 여유만 있다면, ‘다양성과 차이’가 ‘분렬과 정죄와 차별’의 결과만을 초래해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는 것이다. 물론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교회를 분렬시키기고 파괴시키려고 작정하고 들어오는 사이비종파나 이단종파는 ‘보편적 교회’안에 포함되지 않는다.  

 개신교 교회가 늦게나마 ‘교회의 하나임과 보편성’을 진심으로 고백한다면, 단순히 입술로만 고백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서 물질로서 증언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의 양극화는 일반사회계층의 양극화보다도 더 심각하다. 오늘의 대형교회는 지난날 농어촌교회 뿌리에서 자란 하나님백성들이 급격한 한국사회의 도시화 및 산업화과정에서 도시로 모여들어 형성된 사회격변적 요인이 크다. 만약 도시교회의 대형교회들이 농어촌교회나 빈민가의 어려운 형제교회를 “목회자가 무능해서 교회성장을 못시키고,  성령의 역사가 그 교회 안에서는 역사하지 않기 때문에 작고 약한 교회가 되었다”고 판단한다면 대재벌 기업체가 동네 골목 가개나 기존시장 상권을  침입하여 양극화를 가속화시키는 논리와 똑 같은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 보물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12:4) 하셨다. 사도행전엘 보면 초대교회 성령공동체는 “한 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4:32)고 전한다. 오늘날 현대사회는  신자본주의 경제제도의 모순이 날마다 불거져나와 1% 대 99% 대립논리가 사회경제적으로 진지한 문제의식이 되었다. 예수님은 1마리의 양을 찾기위해 99마리의 양을 길위에 놔두고 잃은 1마리를 찾아가지고 와서 99마리와 함께 걸어나갔다. 그것이 교회가 따라야 할  복음논리다. 99마리를 위해서 1마리쯤 아니 10마리쯤은 희생시켜도 괜찮다는 논리는 세상논리다.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교회의 하나임과 보편성’ 믿음이 있다면 모든 등록된 교회들이 개별교회 1년예산의 1%를 무조건 성별하여 개별교회가 소속한 교회연합조직체인 한국교회협의회(NCCK)나 한국복음주의협의회(KEA)에로 보내어 투명하게 관리하고  약한교회를 돕는 기금으로 사용할 수 없을가? 이 일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일가? 어려운 일이 아니라 맘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요, 개교회주의와 교파주의가 발호하고 특히 부자대형 교회지도자들이 ‘교회는 하나요 보편적임’을 이론적으로만 말 할뿐 현실적 으로는 믿지않고 부정하기 때문이다. 회개와 개혁을 촉구하며 ‘행동하는 양심적 신앙’이 요청되는 시대이다.


(3) ‘거룩하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의 현실적 실현을 위하여

  오늘날 개신교안에서 교회의 ‘거룩성’과 ‘사도성’이 훼손된데는 일차적으로 성직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평생을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고 정년은퇴한 목회자들의 모습에는 두가지 모습이 공존한다. 그 한부류 모습은, 정말 더없이 겸허하시고 완전 성숙한 영성으로 인하여 그 심령이 맑고 바르면서도 자기 자랑이나 명예욕이나 지나친 자괴감에서도 자유로운 ‘자족하는 비결을 터득한 노사도의 모습’(빌4:3)인 것이다. 다른 한편엔  슬프고 불편한 진실이지만, 놀랍게도 인간성 그 자체는 완전히 말라버리고 평생 대접만 받은 습관 때문에 남을 전혀 섬길줄 모르고, 여전히 ‘하나님의 종’이라는 자존망대의 착각 속에서, 무엇엔가 불만과 누구엔가에  원망을 잔뜩품고 살아가는 목회자 부류가 있다.  

  불교종단에 적을 둔 모든 승려들은 ‘하한거, 동안거’(夏安居,冬安居)라는 두차례의 수행기간을 의무화하여, 매번 한달 이상씩 깊은 사찰에서 두문불출 명상수행을 한다. 가톨릭 전통에서도 모든 성직자들이 예외없이 일년에 한차례식 열흘간이나 최소 일주일간 ‘피정’(避靜)이라는 수행기간을 갖는다.  이 땅의 모든 개신교 성직자들이 1년에 2차례, 최소한 열흘 이상 기간 몇군데 지정된 기도원이나 교회당에 모여서   자신을 성찰하고 기도하는  ‘영성수행제도’를 의무화하고 실천하기를 제안하고 싶다. 신년 초에 흔히 갖는 1년 목회구상을 하는 목회자 퇴수(退修)나 안식년 기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의무적 제도설립 이라야 한다.

 신학을 지망하던 그 처음 소명의 시절로 돌아가고, 오직 순수한 맘으로 복음만을 위해 헌신하기로 작정했던 주님과의 처음 약속을 돌아보면서, 자기 영혼에 자신도 모르게 두껍게 낀 명예욕, 물질욕, 권력욕, 지배욕, 성취욕을 씻어내는  일이 절대로 필요하다. 탐심중에서도 가장 무섭고 두려운 탐심이 ‘영적 탐심’임을 각성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목회자 윤리위원회’가 각교단의 존경받는 지도자목사들과 학자들로서 구성되었다는 교계뉴스를 최근 접했다. 얼마나 개신교의 개혁이 절박하고 심각하면 그러한 위원회를 발족시켰겠는가?  좋은 결실을 맺기 기대한다.  고려시대 불교국가 안에 수많은 사찰이 경쟁하듯이 들어섰지만, 불교가 타락하고 죽었다고 판단되었을 때, 지눌보조국사가 중심되어 전남 순천 송광사를 중심도량으로 삼고 저 유명한 ‘정혜결사’(定慧結社) 자정운동을 일으켰다. 그 자정운동의 물줄기가 20세기 말까지 흘러내려 법정스님이 출현한 것이다.

 정녕 개신교 안에는 갈릴리복음 예수 제자직 신앙동지들의 ‘예수살기 갈릴리 복음결사’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일가? 성령의 바람이 조용히 한국 목회자들의 가슴에 불어 들어오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1907년 그 어느 집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우리를 심판하고 치유하시고  새롭게 중생(重生) 시키소서.” 참회하는 심정으로 간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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